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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알아가기] 태국의 근대화를 이끌고 113명의 부인이 있던 쭐랄롱꼰왕 수난타왕비의 비극과 노예제도폐지

KoThai 2020. 11. 27. 17:22

 

안녕하세요~~코타이입니다.

 

오늘은 태국의 노예제도폐지에 대한

내용으로 작성했습니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인도, 아메리카,

중국, 일본, 조선 등

노예제도가 없었던 국가를 찾아보기를

힘들 정도로 전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은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운동들도 많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한 지도자도 있습니다.

 

태국도 노예제도가 있었고 노예제도를

폐지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바로 라마5세 쭐랄롱꼰대왕입니다.

 

쭐랄롱꼰대왕은 세계대전당시 영리하게

일본과 서구열강들의 힘을 잘 파악하였고 이를

적절하게 조율, 타협하면서 처세하여 식민지배를

당하는 상황을 피했습니다.

 

또한

근대식 학교설립, 토지개혁, 조세제도,

애민정책, 외교정책 등 다방면에서 군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면서 국민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훌륭왕 왕으로 기억되고있습니다.

한국지폐 만원짜리에 세종대왕이 새겨져 있듯이

태국지폐100바트에 쭐랄롱꼰대왕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절대왕정시절 태국 국민들은 국가에 노동력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했습니다.

(일년에 4개월~6개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을 대신하여

돈을 내거나 곡물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년에 절반가량을 일을하거나

돈, 곡물을 내는게 벅찼습니다.

 

그래서 돈을 대신 내줄 후견인의 노예가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거나 도둑질 등의 죄를

지은 사람들도 노예가되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노예신분을 대물림받아서

노예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전 국민의 1/3이 노예신분이 되었습니다.


태국은 일부다처제였었는데 쭐랄롱꼰대왕도

영토확장 및 정치적 통합을 위해

부인을 많이 두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영토확장이나 부족, 영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정략결혼을 하여

부인을 여러명 두었던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쭐랄롱꼰대왕은 113~116명의 부인이 있었고

자녀는 약 80명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많은 왕비들 가운데 쭐랄롱꼰대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왕비는 첫번째 왕비인

수난타왕비입니다.

 

쭐랄롱꼰대왕은 별궁인 방파인에 머물던 중

수난타왕비가 보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수난타왕비는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강을 내려왔고 방파인에 거의

도착했을 때 배가 전복됩니다.

 

임신5개월의 수난타왕비와 한 살 밖에 안된

공주도 강에 빠지게되었습니다.

 

수 많은 노예들은 그 광경을 보고있었지만

아무도 왕비와 공주를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노예신분으로 고귀한 왕족의 몸을

접촉하여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신분으로 왕비와 공주를 구하더라도 왕족의

몸에 접촉했다는 이유로 큰 벌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노예들은 그저 바라만 보았고

결국 왕비와 공주는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쭐랄롱꼰대왕은 큰 상심에 빠졌으며

이를 계기로 노예제도의 폐단을 깨닫고

훗날 노예제도를 폐지하였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슬퍼하고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를 계기로

제도를 개선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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